베트남인들에게 무덤은 매우 중요하다. 무덤의 배치가 혼이 영혼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에 영향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죽은 자들에게 올리는 형식을 갖춘 제의가 산 자들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믿음도 있다. 그러므로 후에 교외의 향수(후옹) 강 유역에 있는 베트남 황제의 무덤들이 이토록 공들여 세워진 것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 무덤들은 왕조가 앞으로 성공할 수 있느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말이다.
이 유적지는 두 가지 기능을 했다. 무덤인 동시에 황제가 손님들을 대접하는 제2의 왕궁이기도 했다. 따라서 무덤을 건축하는 일은 무덤 주인인 황제가 살아 있을 때 시작되었으며, 황제의 취향과 개성이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지아 롱의 무덤은 단순하면서 웅장한 스타일인 반면, 가장 정교한 무덤 중 하나인 투 둑의 무덤에서는 데카당트라는 그의 명성이 풍겨난다. 그의 통치기에 프랑스의 지배가 점점 강해지면서 군주의 권력은 쇠퇴했고, 통치 말기로 갈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무덤에 쏟아 붓게 되었다. 그의 유해와 보물들은 이곳이 아닌 비밀 장소에 묻혀 있다. 카이 딘의 무덤은 대부분이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콘크리트를 이용해 지어졌으며, 초기의 무덤들에서 보이는 조화로움이 없다.
카이딘황제는 응우옌 왕조[阮王朝]의 후기인 1916년에서 1925년까지 통치하였고, 이 능은 192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31년에 완성된 서구적인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중국식을 본뜬 여타 황제릉과는 확연히 대비되는데, 프랑스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유럽식의 건축 양식이 많이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석조와 콘크리트로 된 고딕 양식의 건물과 첨탑들은 마치 유럽의 성당과 흡사해 보이고, 심지어는 황제를 호위하는 석상의 얼굴들 중에도 서구적인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황제의 무덤이 위치한 본 건물인 계성전에는 청동에다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의 등신상이 있으며, 황제의 유골은 이 동상 아래 지하 18m 깊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계성전의 벽과 천장은 서양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자기와 유리로 화려하고 현란하게 꾸며져 있다.
황제의 무덤들과 후에 성채는 1993년 '후에 유적지'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이 유적들은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걸쳐 있다. 1800년대 중반 베트남이 프랑스에 주권을 잃고, 지배 가문이 식민 군주의 허수아비로 전락했던 시기를 포함해서 말이다.
후에,베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