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사람들의 둘렛길
부산사람들의 쉼터.
부산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 금정산이 아닐까?
곰뫼산우회의 월요산행으로 고당봉을 찾았다.
해발 높이 802m인 금정산은 그다지 높지도 계곡이 깊지도 않다. 얼핏 보아 평범하기 그지없는 듯하지만, 산에 깃들여 보면 그 품이 토실토실 부드럽고 넉넉함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정상인 고당봉 부근만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벼랑으로 봉긋 솟은 바위봉우리인 것이 매우 독특하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할까. 그러면서 주위엔 바다와 강이 동반하는 멋진 풍광도 따른다.
범어사에서 시작된 산행이 북문에 이르면 웅장한 성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아랫 부분만 남아있던 성벽을 복원한 금정산성이다.
사적 제215호. 둘레 1만7336m, 지정면적 71만5468㎡. 금정산 꼭대기에서 서남으로 계곡을 따라 축성되었으며 동서남북 사방의 성문과 수구문·암문 등의 시설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이 성은 1703년(숙종 29)에 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으로 하여금 쌓게 한 것으로서, 둘레 9,011보(步), 높이 15척(尺)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전인 1667년(현종 8)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보수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보다 더 오래된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한편, 이 성이 낙동강의 하구와 동래 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하기 위한 성곽임이 확실하고, 또 성의 규모나 성벽의 축조양식으로 볼 때 처음 축성시기는 삼국시대까지도 올려볼 수 있어서 ≪증보문헌비고≫의 축성기록은 초축(初築)이 아닌 수축(修築)으로 보인다.
그 뒤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 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장대(將臺)·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또한, 1806년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성을 중수하고 동문을 신축하였으며 서·남·북문에 문루(門樓)를 만들고 수비군을 배치하였다.
이때의 길이는 32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숙종 이래의 산성 수축공사의 경위를 새긴 금정산성복설비(金井山城復設碑)가 지금의 동래구 장전동에 건립되었다. 동쪽 성벽은 산꼭대기부터 500∼600m의 분수령을 따라 험준한 지형과 암벽을 이용하여 요새를 이루고 있다.
서쪽 성벽은 산꼭대기에서 구포방면의 능선과 계곡을 건너 동쪽 성벽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벽은 이곳에 많은 화감암을 자연석 그대로 1.5∼3m의 높이로 지형의 굴곡과 고저에 따라 쌓았으며, 중요한 부분에는 가공한 무사석(武砂石 : 네모 반듯하게 다듬어 높이 쌓아 올리는 돌)을 사용하였다.
성문에는 문루를 세웠고 서문 옆에는 3련의 홍예형 수구문을 설치하였으며, 성벽의 요소요소에는 보루와 암문을 설치하였다. 설치 당시 성내에는 중군소(中軍所)와 군기고 등 수비에 필요한 건물과 국청사(國淸寺)·해월사(海月寺)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국청사만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약 4㎞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우리 나라 최대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1972년에 동문과 남문이, 1974년에 서문과 수구문 및 망루가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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