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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경주 최부자댁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 :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보통 경주 최부잣집 또는 경주 최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가옥이 위치한 곳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진다. 경주최씨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여 약 200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이전까지는 최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인 최진립(崔震立)부터 약 200년 동안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경주 내남면 게무덤에서 7대를 내려오면서 살았고 교동에서 5대를 만석꾼으로 유지하며 살았다.

최부잣집에서 전해오는 전통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고 했다. 또한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며느리는 3년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100리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고 했다. 최부잣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이 이 집으로 피신하였고 최익현 선생이 여러날을 머물러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사랑채에서 엿새동안 머물면서 최준(崔浚 1884~1970)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최준은 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백산상회는 결국 부도를 맞게되었고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殖産銀行)과 경상합동은행에게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식산은행 아리가(有賀光豊) 총재가 최준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해방후 최준은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자금이 한푼도 빠지지 않고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고 백산의 무덤에서 그를 기리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전 재산은 교육사업에 뜻을 둔 최준의 뜻에 따라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 재단에 기부하였다.

현재의 가옥은 170여 년 전의 건축으로, 그 평면구조가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건물재목들도 일반가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재목을 썼을 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부지는 약 2천여 평이고 후원이 약 1만 평이었으며 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이집에 살았던 하인이 약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69년의 화재로 사랑채 ·행랑 ·새사랑채와 그 남쪽에 달린 바깥 변소 등이 소실되었고, 문간채 ·고방 ·안채 ·사당 ·뒤주가 남아있다. 특히 뒤주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 이런 뒤주(쌀창고)가 여러 채 있었지만 현재는 1채만 남아있다. 1971년 5월 26일 중요민속자료 제27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교동최씨고택 [慶州崔富者屋]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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